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숙빈 최씨 (문단 편집) === 후궁이 되다 === 변변치 못한 신분인 숙빈 최씨는 숙종의 눈에 띄어 [[승은]]을 입고 임신까지 하여 후궁으로 신분이 수직상승했다. 숙종 19년(1693년) 처음 내명부 종4품 숙원(淑媛)으로 책봉되었고 그해 10월 6일 아들 영수(永壽)를 낳았다. 이 아들은 두 달 만에 사망했는데 영조의 형이다. [[희빈 장씨]]보다 11살이 어린 숙빈 최씨가 회임하고 후궁이 되자 당시 왕비였던 희빈 장씨의 강력한 경쟁 상대로 떠올랐다. 그 탓에 인현왕후가 복귀되기 전까지는 고초도 많이 겪은 모양이다. [[노론]] 세력이 희빈 장씨를 '''천하의 악녀'''로 기록한 <수문록>에 나오는 이야기라 100% 신뢰할 수는 없지만, 처음 태기가 있었을 무렵 당시 중전이었던 장옥정이 최씨를 죽이려 했다는 이야기까지 있다. >숙종이 졸다가 꿈을 꾸었는데 용이 땅에서 나오지 못 하고 울면서 살려달라고 청했다. 이에 중전 장씨의 처소에 가니 빈 독이 뒤집혀져 있었는데 그 독 안에 두들겨 맞은 임산부 숙빈 최씨가 있었으며 급히 응급 조치를 하여 태아와 숙빈 최씨를 살릴 수 있었다. 이 일화는 지어낸 이야기일 가능성이 높겠다. 아무리 숙빈 최씨의 신분이 낮다고는 해도 [[야사(역사)|야사]]대로라면 장옥정은 감히 '''왕의 씨를 밴 여자를 죽이려 한''' 왕비가 된다. 물론 [[세자]]와 그냥 [[왕자]]가 같지 않고 장옥정이 중전이기는 했지만 그래도 감히 '''왕의 자식'''을 해치려 했다면 절대 그냥 넘어갈 수 없는 대죄가 된다. 그리고 "용이 땅에서 나오지 못하고"라는 대목을 보면 알겠지만 용은 임금을 뜻하는데 그냥 지어낸 얘기일 확률이 100%다. 어떻게 태어나지도 않은 아이가 왕이 될지 안 될지 안단 말인가. 하다못해 성 감별도 없던 시절에 말이다. 심지어 고증(?)도 엉망이다. 숙빈 최씨 소생으로 가장 유명한 영조는 차남이며 영조가 태어났을 때 장희빈은 희빈으로 다시 강등된 뒤였다. 숙빈은 임금의 총애를 받고 왕자를 낳았기에 수많은 견제와 공격을 받았음은 사실이고, 이에 맞서기 위해 [[서인]] 세력과 친밀해졌다. 비천한 출신에 뒤를 봐줄 배경도 없는 데다가 장옥정의 견제가 극심했기 때문에 별다른 방도가 없었을 것이다.[* 위의 설화는 거짓이라 하더라도 적어도 저런 설화를 창작해낼 정도로 두 사람 간의 사이가 좋지 않았음은 추정할 수 있다. 희빈 장씨도 왕비가 될 수 없는 중인 신분에서 총애 얻고 아들 낳고 왕비가 된 것이니 비슷한 루트를 밟는 숙빈 최씨가 거슬릴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영조|연잉군]]은 훗날 서인 분파인 노론 세력과 손을 잡았다. 세간에는 숙빈 최씨가 연잉군을 낳고 숙의(종2품)에서 바로 빈(정1품)으로 승봉했다고 아는 사람들이 많지만, 실제로는 그보다 낮은 귀인(종1품)으로 진봉되었다. 그마서도 영조를 낳고 곧바로가 아니라 1년이나 지나 결정되었다. 이후에 귀인으로 5년을 지내다가 빈에 진봉되었는데 숙빈이 왕자를 낳고 바로 숙의에서 빈으로 봉해졌다는 이야기는 사실이 아니다. 인현왕후를 폐위하고 희빈 장씨를 중전으로 앉혔다가 다시 인현왕후를 복위시키고 희빈 장씨를 도로 희빈으로 강등시킨 것은 숙종의 [[왕권]] 강화책이었다는 것이 정설이지만, 그 구실을 만들어준 사람이 다름아닌 숙빈 최씨다.[* 희빈 장씨가 폐위됨은 인현왕후가 복위되면서 자동적으로 이뤄졌다.] 또숙빈이 숙종에게 '희빈 장씨가 인현왕후를 [[저주]]했다.'고 고자질한 사실은 흔히들 야사로 알지만 무려 <[[조선왕조실록]]>에도 기록된 바이다. 누군가를 죽음으로 몰아넣을 수도 있는 일을 고한 것으로 보아 대중매체에 그려지는 현숙하고 천연덕스러운 모습과는 달리 궐 내에서 정치적인 행보를 보이지 않았다고 볼 수 없다. 물론 뒷배경도 없는 숙빈 최씨가 궁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는 서인과 손을 잡음은 선택이라기보다는 필수였다고 볼 수밖에 없겠지만 말이다.[* 어차피 숙빈 최씨가 달리 손잡을 대상은 서인 아니면 남인인데, 남인은 희빈 장씨의 편인지라 자연스레 대상은 서인뿐이다. 물론 희빈 장씨가 잘 대해줬다면야 남인과 손잡았을 수 있겠지만...] 대중매체에 잘 그려지지는 않으나 [[영빈 김씨]]와는 친하게 지낸 듯하다. 1살 차이 또래인데다[* 영빈 김씨가 숙빈 최씨보다 1살 위였다.] 같은 서인 측 배후인 것도 있고 영조와 [[인원왕후]]가 [[경종 독살설]] 배후로 지목돼 죽을 뻔한 영빈 김씨를 [[구사일생]]시켜서 말년을 후하게 살게 해준 점으로 볼 때 숙빈 최씨와 영빈 김씨가 붙어다녔을 것이라는 추측은 신빙성이 있다. 물론 영빈 김씨가 숙빈 최씨와 가깝게 지내기 시작한 시점은 언제인지 모르나 대다수는 숙빈 최씨가 영조를 낳은 때로 보고 있다. 숙빈 최씨의 영조 출산 후 1년 정도는 영빈 김씨(당시 귀인)가 숙빈 최씨(당시 숙의)보다 2단계 정도 품계가 높았는데 집안도 그렇고 나이도 1살 많다는 점을 고려했을 때 영빈 김씨가 먼저 숙빈 최씨에게 다가갔을 것이라는 쪽이 유력하다. 숙빈 최씨가 이듬해 자신과 품계가 같아질 것을 어느 정도 예견한 듯. 단순히 품계가 같아짐을 넘어 숙빈 최씨는 왕자를 낳았기 때문에 확실히 숙빈 라인에 서는 편이 나으리라고 영빈 김씨가 계산했을 수도 있다.[* 물론 두 사람의 집안이 운니지차였기 때문에 영빈 김씨가 후궁 품계가 높았던 시기에는 숙빈 최씨를 거들떠 보지도 않았을 것이라는 이야기도 있다. 숙빈 최씨는 한미한 집안이었지만 영빈 김씨는 [[안동 김씨|아버지 측]]과 어머니 측 둘 다 엄청난 파워를 자랑하던 명문 세도가 출신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당시에는 아들을 낳은 후궁이 [[권력]]을 쥐는 법이 당연하니 서인 측 사람들도 영빈 김씨가 아닌 아들을 낳았던 숙빈 최씨를 밀어줬다. 무엇보다 영빈 김씨는 아들이 없을 뿐 아니라 이상하리 만큼 숙종에게 미움을 샀다. 즉, 출신은 달라도 숙빈 최씨는 아들도 있고 총애까지도 받으니 그걸로도 출신의 약점을 상쇄할 만하고 때문에, 두 사람 입장상 서로 무시하거나 질투하기보다는 잘 지내는 게 답이었을 것이다.] 숙빈 최씨의 입장에서도 영빈 김씨와 연합함은 꼭 필요했을 터이다. 아무리 자신이 아들을 낳았다고는 하나 당시 중전은 엄연히 장옥정이었고, 세자 또한 장옥정의소생이었기 때문에 당장 아무 뒷배 없는 천한 신분 출신 후궁의 아들은 목숨이 위태로움을 모를 리가 없었다. 장옥정을 미는 남인쪽과는 결탁할 수 없으니 당연히 영빈 김씨의 서인 측과 손을 잡지 않으면 안 되는 상황이었을 것이다. 이 두 사람의 품계가 같았던 시기는 숙빈 최씨가 영조를 출산한 이듬해부터 약 5년 정도였으며 이후에는 4년간 숙빈 최씨가 영빈 김씨(당시 귀인)보다 높았다. 물론 훨씬 이전인 1694년에는 영빈 김씨(당시 귀인)보다 숙빈 최씨(당시 숙의)의 품계가 더 낮았다.[* 처음에는 갓 입궐한 희빈 장씨(당시 숙원)보다 높았던 소의였으나 이후에는 중전 후보에서도 밀려버리지를 않나, 숙빈 최씨에게도 4년간 아랫사람 신세가 되어버렸다. 사실 이는 영빈 김씨가 기사환국으로 숙종에게 미움을 산 것도 영향이 있다. 이는 아무리 후궁이 날고 기어도 후궁에게 품계를 내려주는 사람도, 후궁에게 총애를 주는 사람도 결국 임금이기 때문이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